17세기 조선 뛰어넘기
작성일 : 2012-11-19   조회수 : 1654

17세기 조선 뛰어넘기

 

 

1주일에 신간 한두 권의 원고를 읽어내야 하는 빠듯한 시간 틈을 헤집고 남의 출판사 책을 찾아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직업으로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는 30년이 넘는 일상이 되었다. 매번 죽기살기식의 출산의 고통을 거쳐 세상에 나와 이름을 붙여준 책만도 2,500권을 넘어서고 있다. 책 속에 파묻힌 직업이라고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는 친구들도 많지만 항상 내가 읽고 싶은 책만을 출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취미와 직업이 같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우리 삶에서 그런 직업이 어디 있으랴 싶다. 최근 언론인 작가의 책 몇 권을 출판사 전체 직원들과 윤독회를 가졌다. 이미 식상해버린 취미가 독서라든지,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호들갑도 싫었지만, 마침 금년을 비전도 없이 말로만 새삼스레 ‘독서의 해’라고 명명한 관리들의 무사태평한 밉상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작은 실천을 통해서라도 젊은 그들이 우리의 삶만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그리고 나도 이 책 속에서 몇 가지 작은 보석 같은 생각을 이삭줍기할 수 있는 망외의 기쁨을 같이했다.


김영희 대기자의 유쾌한 반란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의 《소설 하멜》(중앙books, 2012)을 오랜만의 감동으로 읽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언론인 작가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이나 〈지리산〉이 주는 감칠맛이 되살아났다. 언론현장에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취재하고 분석하는 기자활동에도 여념이 없을 텐데 이 소설을 8년 동안 붙들고 창작욕을 불태운 작은 거인의 그 열정에 승복하고 만다. 〈하멜 표류기〉를 읽지 않고 그 제목만 외우면서도 지식인인 척 살아남을 수 있는 오늘의 허위의식을 그는 일부러 탓하지도 않는다. 애써 모른 척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순을 앞둔 이 노언론인의 2천 매가 넘는 대작이 지르는 마음의 빗장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일상이 된 허위의 껍데기에 숨기 위해서라도 밤새워 이 소설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하멜의 표류기이고 어디가 작가의 소설인지를 구태여 가려볼 틈도 없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만큼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함께 유려한 문체에 마법처럼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의 본분은 치열한 현장취재만이 아니라 이를 실어 나를 문장력이 제1장 제1과임을 절감한다. 그것이 신문기사이든 소설의 형식을 빌리든 말이다.


소설의 처음은 항상 사랑하는 여자와의 안타까운 이별로 시작된다. 우리의 주인공은 미지의 고난을 헤치고 살아남아 새로운 자의식을 발견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22세 청년 하멜은 〈빠삐용〉이 그러했듯이 음모로 인해 또는 오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기 위해 모두가 선망하는 증권 중개인 자리를 내던지고 전혀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운명을 건다. 암스테르담에서 자카르타를 거쳐 극동 무역본부인 일본의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을 향해 죽음의 항로로 가는 동인도회사 무역선이 그것이다. 가끔은 우연이 필연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제주에 표류한 하멜 등 네덜란드 선원 36명이 그 주인공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17년이 지난 17세기 중반의 조선에게 “그들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조선에서의 13년 동안 세계최강의 무역국 선원답게 조선, 화포제작, 천문 역서, 응급조치 등 서양의 문물을 우리에게 전할 수도 있었다. 이미 27년 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훈련도감에서 총포제작에 종사했듯이 말이다.


못난 조선의 미친 세월

그러나 그때 조선은 중국을 세상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는 소중화(小中華)라도 열심히 해야 살아남는다는 세계변방의 청맹과니에 불과한 채 캄캄한 동굴 속에 살고 있었다. 세상으로 열린 창은 중국으로 이르는 동지사 사신과 조공을 바치는 무거운 발길로 뒤덮인 대륙으로 통하는 육로밖에 없었다. 이미 15세기 초 아프리카 케냐까지 30여 개국과 무역한 명나라 정화(鄭和) 함대의 기상은 배워오지 못하고, 실용성은 배제된 충효와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성리학만을 지존으로 삼아 그들만의 왕국 속에 칩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자랑하는 500년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도 기실은 국가경영에 필요한 경험의 축적이라기보다는 왕권을 견제하고 사대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계략의 일환일 수도 있다. 왕들은 자신의 언행만이 아니라 선왕의 언행도 볼 수 없었다. 선대의 체험은 기밀로 하고 오직 고대 중국왕들의 가르침만 달달 외워 그 사례만을 가지고 국정이 논의되었다. 여러 차례 반정의 쿠데타에 성공한 무리들은 왕의 실정(失政)을 보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설계를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보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냥 그대로의 틀 속에서 국가 속의 또 다른 국가로서 자신의 영화만을 추구한 것으로 그쳤다. 백성들은 해마다 반복되는 한해(旱害)로 굶주림으로 죽고, 창궐하는 괴질이라는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병들어 죽는데도 말이다. 과연 조선이 백성들과 함께하는 국가였던 적이 있었던가(김남, 《노컷 조선왕조실록》, 어젠다, 2012)?

 

세상은 지리상 대발견으로 무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심지어 일본에서는 이미 16세기부터 칠기로 해외교역을 시작하여 나중에는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고 서양의 과학기술, 의학 등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는 그때였다. 이 도자기는 우리가 이미 700년 전부터 1,300도의 고온에서 구워내야 하는 자기생산의 비밀을 갖고 있던 지금의 반도체와 같은 혁신기술이었다. 어둠에 익숙한 동굴의 질서에 새로운 빛줄기를 수용할 우리의 왕은 없었다. 오히려 병자호란으로 헐벗은 백성들을 닦달하고 신하들의 충심을 결집해 왕권을 지키는 방도로 새로 태어난 청나라를 치려는 북벌정책이라는 망상의 안개에 질식하던 효종의 나라였다. “도도한 변혁의 바람, 역사의 수레가 굴러가는 방향을 보지 못하는 이 나라의 혼암(昏暗)한 군주가 나라와 백성을 온전히 바람 앞의 등불로 내던졌다”고 저자는 개탄한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한 역사의 패러독스는 있을 수 있다. “한국인이 하멜의 이야기를 평정심을 갖고 읽기는 쉽지가 않다. 조선조정이 그들의 표착을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우리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라는 그의 육성의 울림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미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겪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이 나라에 대한 연민과 울분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그려낸 이번영의 《소설 징비록 ― 왜란》(나남, 2012)에서도 조선의 왕과 신하들의 지지리 못난 행태들로 나라이기를 포기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라가 왜구의 침략에 드러난 폭풍전야의 위기였음에도 당쟁에 빠져 적정을 살피고 돌아온 일본 특별조사단의 보고가 나라의 안위보다는 당파의 이익에 좌우되고, 엘리트 정여립의 모반사건 조작으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날밤을 새우는 온통 어둠의 빛깔로 도배된 무능한 선조의 나라였다. 7년전쟁 동안 이민족이 휘두른 살육의 광풍 속에서 백성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은 어떠했는가. 나라 전체가 공동(空洞)화한 참담한 상흔을 반성하지 못한 왕과 지배계층의 무책임한 망각은 40년 만에 병자호란을 자초한다.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성리학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의 어리석음으로 선조의 손자인 인조는 청나라에게 항복문서와 함께 왕자 2명과 30만 명의 백성을 포로로 바치고서야 나라를 구걸한다. 아,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이 나라를 굽어살피소서.


처음 경험하는 섬나라 사람으로 살아남기

그렇게 안타깝게 바랐던 그때 17세기 중반의 ‘세기 뛰어넘기’는 3백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다. 독립운동가의 손자인 서울신문 문소영 기자가 피를 토하듯 그려낸 17세기의 《못난 조선》(전략과문학, 2010)은 20세기가 되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40년 동안 세계지도상에 조선의 이름이 사라졌고, 광복 후에는 민족의 명운을 건 6ㆍ25전쟁으로 하늘과 땅이 맞붙는 듯 백성도 나라도 잿더미가 되었다. 500년 동안 천상의 규범인 듯 모셨던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학(儒學) 지배체제의 허망한 붕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3차대전에 버금가는 난리를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도 모르면서 이 땅 한반도와 백성들이 온몸으로 치러내면서 우리의 중세시대나 봉건주의는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지만 나라가 어찌 되든 오직 일족만의 영화를 챙겼던 지배계층의 자기들만의 겉치레가 폭파당한 자리에 모진 목숨을 부지해온 그냥 국민이라 이름 붙여진 생얼굴의 토착민들이 야생초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시민으로, 정확하게는 농민, 노동자로 성장하면서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대들보가 되어야 했다. 이병주의 〈산하〉는 전쟁으로 몰락한 양반댁의 안방마님을 업고 서울에 숨어든 머슴의 성공사례를 잘 그려냈다. 상놈의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나무랄 일만은 아니었다. 그 말이 시민의 시대가 되었다고 들리기도 하는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식보다는 전쟁은 항상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은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된다고 했는지 모른다. 

 
전쟁은 한반도를 둘로 분단하면서 멈췄다. 이제까지 세상으로 통하던 창이었던 대륙으로의 길목은 다른 나라가 된 북쪽군대가 높이 쌓아 올린 철조망으로 막혔다. 우리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대륙에서 분리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이 되는 냉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제는 걸어서는 물론 철도나 자동차로는 외국으로 나갈 수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잃을 것도 없게 되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으니, 살아남기 위해 험난한 뱃길(海路)을 개척하며 세계 무역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친 60년 세월의 비장함은 새삼 말해야 무엇할 것인가. 


벌써 사반세기의 역사가 되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처음 세계만방에 얼굴을 내민 평화의 제전이었다. 하멜표류기에 묘사된 헐벗고 무지몽매한 조선의 얼굴이거나, 히틀러에게 월계관을 받는 일장기를 가슴에 새긴 식민지 청년 손기정의 얼굴도 아니며, 6ㆍ25전쟁의 공포에 떠는 얼굴도 전쟁고아의 얼굴도 아닌, 환한 미소가 퍼진 인간의 얼굴을 한 맨얼굴이었다. 서로 견제하고 냉전으로 갈등하며 반쪽 올림픽을 치렀던 제1세계(1984년 LA올림픽)와 2세계(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가 화해의 장으로 점지한 곳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도 이데올로기 냉전의 고질을 앓고 있던 서울이었다. 의외성은 또 의외의 결과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꿈꾸지도 못할 대변혁의 음모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장소만 빌려주었고 우리 사는 모습을 땀 냄새 그대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세계가 손에 손잡고 벽을 넘자던 서울의 올림픽 합창은 그다음 해에 동독이 무너지고 소련연방이 해체되는 인류평화 공존의 단초를 여는 행운의 열쇠가 된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여러 차례 이데올로기 전쟁에 휘말렸던 20세기의 거대한 앙시앵레짐의 완고한 철벽이 타이타닉의 침몰처럼 쓸쓸히 퇴장하고 만다. 우연히 세계 대변혁의 현장에 섰던 당사자인 우리들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단지 국운(國運)이 있는 거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 


그 서울올림픽이 있고 14년이 지나면 2002년 월드컵 축구가 서울에서 열린다. 하멜의 후손인 히딩크 감독의 멀티플레이어의 리더십 전략과 “아직도 승리에 배고프다”는 불굴의 투지로 무장한 한국축구는 월드컵 최초 본선 진출이 아니라 아예 단숨에 축구 4강이라는 감동을 같이 나누기도 했다. 길거리 응원이 아니라 바로 전국의 광장에 물결친 붉은 악마의 함성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전례에 따른 응원도 아닌 처음 시도해보는 우리식의 사육제(謝肉祭)였는지도 모른다. 레드컴플렉스의 극복이나 민족주의의 부활로나 해석하려는 지식인인 척하는 허위의식에 대한 유쾌한 배반이었다. 그럴 만한 때에 그럴 만한 에너지가 월드컵 축구를 빌미로 5천 년 전 치우대왕의 깃발 아래 용솟음쳤던 것이다. 광장에서 함께 어울려 춤춰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아! 대한민국’은 단순한 승리의 구호가 아니었다. 몇백 년 억눌렸던 저 폐부 끝에서 울리고 떨리면서 목쉰 합창으로 터져 나온 세상 사람 모두를 향해 포효하는 새 시대의 겁 없는 집단추임새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때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맨유나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의 대표선수 한 사람의 몸값이 우리 대표팀 전체예산을 넘어서는지도, 그들의 인기가 그렇게 하늘을 찌르는지도 몰랐다. 박지성이나 박주영이 세계무대 진출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프랑스,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을 넘어 4강에 진출했으니, 축구에 열광하는 유럽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국가브랜드가 얼마나 강력하게 각인되었는지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때 우리 대표단 축구감독이 네덜란드 사람이었던 것이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7세기 베스트셀러 〈하멜표류기〉로 우리의 존재를 어설프게나마 유럽에 처음으로 알렸던 하멜, 이제는 암스테르담 어딘가를 떠돌 그 하멜의 영혼에게 우리는 야만의 나라였던 적이 있었다고 말해줘도 좋을 듯싶다.


한국인이 세계를 상대로 띄운 무수한 무모한 모험의 무역선은 험난한 파도 속을 뚫고 이제 만선의 기쁨을 전하기도 한다. 북, 장고, 꽹과리를 드높이 울리며 경하해야 할 민족의 축제이다. 포항의 제철회사가, 울산의 조선소와 자동차회사가, 수원의 반도체 전자회사가 선진 일본의 동종 산업체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세계적 기업들은 한 일족의 사유기업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 모두의 땀의 결정체임을 존재이유로 새겼으면 좋겠다. 그리해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최근 50년 모든 가치를 희생하고 광분했던 압축성장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을 것이고, 잉여생산의 과실이 예술문화의 창조로 승화할 수도 있다는 성숙한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바라옵기는 지금의 부자나라가 계속되어 우리 자식들이 선입견에 좌우되지 않고 세계인으로써 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세상을 헤쳐 나갈 때에도 든든한 바탕이 되는 나라이었으면 싶다. ‘단군이래’ 가장 잘살고 있는 개인 평균소득 2만 달러 시대의 세계무역 10대국의 깃발이 지금 우리의 역사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상호 | 나남출판

이전글 새해 시청 광장에 손자를 안고
다음글 지중해를 건너는 법 혹은 사막을 건너는 법
이름 비밀번호
* 왼쪽의 자동등록방지 코드를 입력하세요.

 

조선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이 명칼럼을 읽고 다시 절감했다. 광활한 대륙에서 동진해온 한민족은 좁은 한반도에서만 머물기에는 에너지가 넘치는 민족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현재와 미래가 밝아지리라.

 

고승철  |   2012-11-21 09:21:00  |   댓글  |   수정  |   삭제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