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 선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작성일 : 2011-05-05   조회수 : 1517

지훈 선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문화환경이 전혀 없었던 시골 학생들에게 문화행사는 단체 영화관람이 고작이었다. 〈빨간 마후라〉나 〈성웅 이순신〉, 에델바이스 노래를 배우게 해준 〈사운드 오브 뮤직〉이 기억에 남는다. 〈북경의 55일〉이라는 영화를 관람하고서는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 마지막 장면에 연합군이 중국 태평천국군사의 저항을 뚫고 북경을 탈환하는 장면에서 역사도 모르고 박수를 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역사선생님도 아닌 지리선생님의 꾸중을 들으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고등학생을 상대로 자기 대학에 진학을 권유하는 순회행사가 심심치 않게 열렸다. 이 모임은 손바닥으로 가릴 만큼의 하늘밖에는 보지 못했던 시골학생에게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열린 창(窓)이기도 했다. 육사를 선전하는 화려한 제복을 입은 선배들이 부럽기도 했고 육군군악대의 웅장한 연주도 충분히 가슴을 뛰놀게 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세계로 박차고 나가라며 그때까지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외국대학을 내세우고 절반은 영어를 섞어 쓰던 어떤 선배의 안타까운 성공담을 들으면서 서로 답답해했던 모습도 기억난다.


지훈(芝薰) 선생을 흐릿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지 싶다. 문학강연 등 문화행사라고는 했지만 대학선전의 일환으로 열린 ‘고대(高大)의 밤’ 행사에 참석했다. 당대의 지성인들이 대거 동원된 좀처럼 접해 볼 기회가 없는 교양강좌이기도 했지만, 없는 것을 갈구하는 젊음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먼발치에서 본 한복 차림의 고고한 선비의 강연 모습만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연내용은 기억에 없는데 무엇인지 모를 신선한 충격과 지사(志士)라는 말이 큰바위 얼굴처럼 겹쳤다. 더 정직하게는 풍우(風雨)에 약간 마모된 내 안의 미륵불 같은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르면 후배들에게 수도꼭지마다 막걸리가 꽐꽐 쏟아지는 고대(高大)의 품에 안기라고 호기를 부리는 내 모습이 고대의 밤 행사무대에 나타난다. 은사이신 이희봉 법대교수님과 몇 년 뒤 아웅산 사건으로 아깝게 유명을 달리하신 서상철 상대교수님의 장쾌한 강연 뒷마무리의 인사말이었으나, 후배들에게 호언장담한 막걸리 발언의 뒷감당은 평생의 즐거운 부채가 되었다.


성장과정에서 길을 헤맬 때마다 바른길을 밝혀주는 북극성(北極星) 같은 어른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때그때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극한상황에서도 진일보(進一步)하는 결단도 사실은 나의 용기나 지혜라기보다는 스승의 큰 가르침에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만길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해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빌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는 더욱 없다. 이제까지 왔던 그 걸음으로 늠름하게 한 발자국 더 내딛는 것이다. 


청소년 때부터 그의 선비정신을 흠모하며 사숙(私淑)했던 큰 스승 지훈 선생의 뜻을 나 혼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갖고 싶은 생각이 천둥처럼 울린 것은 1986년 김준엽 전 고대총장의 한국현대사 《장정》(長征) ― 《나의 광복군(光復軍)시절》을 출간하고서였다. 《장정》을 펴내며 일제 침략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중국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말 달리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조국에 남았던 그 가족과 집안이 일제(日帝)에 얼마나 시달렸던가, 보상을 바라고 광복의 투쟁에 앞장선 것은 아니지만 광복된 조국이 그분들에게 한 대접은 무엇이었는가에 생각이 미치면서 후손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새 시대 젊은이들에게 분단된 반도의 움막에서 벗어나 선조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광활한 대륙의 기상을 전달해 주고 싶었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제에 곡학아세(曲學阿世)했던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신(神)’이 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항일 무장투쟁이나 독립운동사 출판이 줄을 잇게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이런 맥락에서 지훈 선생의 글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시중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지훈 선생의 《한국민족운동사》를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1926년 6ㆍ10 만세사건의 항쟁사인 이 책은 청록파 시인의 유장함보다 먼저 심금을 울렸다. 그의 한국문화의 도저한 흐름을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에 소개하고 싶다던 이인수 교수의 요청으로 썼던 〈한국문화사 서설(序說)〉이나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지표로 삼았던 당당한 사자후(獅子吼)였던 〈지조론〉은 거짓과 비겁함에 질식할 것 같았던 한국사회의 격동기를 늠름하게 헤쳐 나오는 선생의 기개에 압도당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훈문학상’을 먼저 생각하겠지만, ‘지훈국학상’을 같이 운영하는 이유는 이러한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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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조 선생에게 사회과학이 세상과 대결하는 칼날이라고 한다면, 문학은 그 칼날에 에스프리를 불어넣는 성찰의 창고”라는 송호근 교수의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조 선생’은 지훈이 아니라 나를 지칭한다는 것을 밝히는 일이 쑥스럽기는 하지만.

이어 1996년 10월에는《조지훈 전집》 전 9권을 완간했고, 2001년 5월에는 '지훈상'(芝薰賞)을 제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대학 졸업 무렵 ‘사헌’(史憲)이라는 별칭을 주실 만큼 정을 주신 한동섭 헌법 선생님에게 ‘지훈이 법학을 전공했다면 이 사회에 무슨 일을 했을까요?’라고 여쭤본 바 있다. 선생의 먼발치에라도 서 보길 원했던 내가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숙제였다. 선생의 뜻이 21세기 지금에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내 마음속 상투를 자르듯 사상의 자유시장에 '지훈상'을 내놓은 이유다.

다행한 것은 마침 나는 튼튼한 터를 닦은 잘나간다는 사회과학 출판사 발행인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남들이 하듯이 거금을 쾌척해서 지훈상 기금을 만들었으면 좋았겠으나 그럴 재원이 없었고 그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가훈처럼 부지런히 언론출판 일을 하면서 나의 성장과 함께 지훈상의 완성을 같이하고 싶었다. 이 마음가짐을 하늘이 알아주었는지 10년 넘게 견딜 만큼 성장을 같이하고 있다고 자위해 본다. 나남출판이 왜 이 상의 운영주체여야 하는가를 자문해 보면서 ‘굽은 노송이 선산 지킨다’는 속담으로 대답을 대신해야 했다. 


지훈과 내가 같은 조(趙) 씨라고 친척이거나 집안사람일 거라는 속된 억측에 웃기도 했다. 지훈은 경상도 영양 주실마을 사람이고, 나는 전라도 남원 의충사(義忠祠)에 모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 선생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춘향전의 원저자’라는 설중환 교수의 연구도 있다.

김종길, 신일철, 조동걸, 신용하, 성찬경, 홍기삼, 김인환, 이성원 선생이 첫 5년 동안 1기 위원을 선뜻 맡아주셔 그 뜻을 같이했다. 선생님 부인 김위남(난희) 여사와 박노준, 인권환, 오탁번 교수가 거의 일을 도맡으셨다. 홍일식 고대 총장을 지훈상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모셨고 나는 상임운영위원으로 이 상의 운영실무와 재원을 책임 맡았다. 


지훈상 2기(2006~2010) 운영위원회의 경우 김인환 선생이 위원장으로, 이배용, 윤사순, 김흥규, 홍신선, 오생근, 최동호, 임현진, 조성택 선생이 위원으로 수고해 주셨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3기 지훈상 운영위원회에는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이자 전 이화여대 총장이신 이배용 선생을 위원장으로 모셨다. 또 이남호, 이문재, 성석제, 송호근, 심경호, 조성택, 강천석, 정영진 선생이 운영위원으로 활약을 펼치실 예정이다. 


그동안의 수상자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제1회에는 이수익(시인), 박경신(울산대 교수) △제2회 이승하(시인), 김태식(홍익대 교수) △제3회 고형렬(시인), 강관식(한성대 교수) △제4회 이시영(시인), 이형성(전북대 연구교수) △제5회 이문재(시인), 이기갑(목포대 교수) △제6회 김기택(시인), 월운 스님(전 동국역경원장) △제7회 김명인(시인), 곽승훈(목원대 교수) △제8회 신대철(시인), 강명관(부산대 교수) △제9회 정일근(시인), 이상익(부산교육대 교수) △제10회 나희덕(시인), 한국고전의례연구회(회장 정경주) 등이다.

‘지훈상(賞)’을 11년째 이어온 인연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고교생 때 한 번 봤다고 그토록 존경할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숙(私淑)은 그런 거라고 믿는다. 선생이 타계하신 지 43년이 됐지만 난 여전히 그의 선비정신을 우러른다.
“지금까지 지훈처럼 살아왔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앞으로 지훈처럼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과 그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남의 말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삶의 지향성을 지훈 정도의 격(格)으로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나 자신을 끌고 나가면 그 가능성이 반드시 내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인으로서 늘 새겨두고 있는 지훈의 시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시를 발견하였을 때는 마치 나를 위해 지훈이 이 시를 남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기뻤다. 제목은 〈인쇄공장〉이다.
 

모래밭을 스며드는 잔물결같이
잉크 롤라는 푸른 바다의 꿈을 물고 사르르 밀려갔다.
물색인 양 뛰어박힌 은빛 活字에
바야흐로 海洋의 전설이 옮아간다
흰 종이에도 푸른 하늘이 밴다.
바다가 젖어든다.
破裂할 듯 나의 心臟에 眞紅빛 잉크,
문득 고개들면 유리창 너머 爛漫히 뿌려진 靑春,
복사꽃 한 그루.

조지훈, 인쇄공장


당신의 시집을 인쇄하고 있던 공장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공장의 기계음을 지켜보다 불현듯 당신이 꿈꾸던 시 세계에 몰입했을 것이다. 시인이 색칠하는 찬란한 색감의 조화에 풍덩 빠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칙칙한 인쇄공장을 상큼한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에 젖게 만든다. 그리고 뭉툭한 인쇄 납 활자는 은빛 갈매기가 되어 춤추게 한다. 만성피로의 먼지에 전 답답한 일상을 일순간에 광대무변의 해양의 전설 속으로 환치시킨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전부터 피어 있던 공장 유리창 너머의 복사꽃은 시인이 문득 정말로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서 의미를 갖는다. 그 꽃은 파열할 듯한 나의 심장에 진홍빛 잉크가 되고, 그 꽃은 난만히 뿌려진 나의 청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적 스승의 존재가치란 늘 그를 존경하는 사람의 현재를 그 스승이 감시하고 격려하는 데 있다. 내가 처한 이 입장을 스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 행동이 스승의 기준에 비춰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나를 엄격하게 지탱시키고 때론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존재, 내게는 지훈이 바로 그런 존재다. 


자기 자신이 늠름하게 설 때만이 비로소 남도 인정할 수 있다. 한국사회를 하나의 인격으로 친다면 아직은 늠름하고 의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신이 어떤 의미의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자각, 그리고 잘하는 이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 이런 모든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힘겹기만 하다. 그보다는 어쩌면 의식의 하향평준화로 치달아야만 긴장을 감춘 채 골목대장의 불안한 평화를 누리려고 하는 건 아닌가.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을 수 있는 것은 그 산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이 받쳐 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의 격을 이처럼 함께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 아직은 미진하다는 것을, 지훈상을 제정한 이후 자주 생각하게 됐다. 우리 젊은 날의 커다란 신화였던 지훈 선생의 추상같은 지조론이 2011년 현재에는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어야 할지 늘 화두(話頭)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불어 “거짓과 비겁함이 넘치는 오늘, 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기치가 지훈상과 함께 계속될 것임을 믿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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