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교수의 정년 기념식에서
작성일 : 2010-10-27   조회수 : 1626

K 교수의 정년 기념식에서

 

 

8월 말의 태풍이 비껴가던 광화문 근처의 레스토랑에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장소의 제한 때문에 K 교수의 말처럼 조각하기보다도 힘들었다는 30여 년 교수 시절의 그리운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대학과 언론, 예술 주변의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그이를 연결고리로 해서 서로 만나는 반가움이 컸고, 이 자리가 여느 정년 기념식과는 다른 예사롭지 않은 자리임을 눈치챘고 여기에 초대받았음을 감사했다. 재개발로 헐리게 되어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장소도 그렇고, 회비나 화환 하나 없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잠깐 눈인사나 하고 예의를 다했다고 그이의 정년기념 저서 《민주주의와 언론》 한 권을 공짜로 챙겨 중간에 도망갈 수 있는 자리는 더욱 아니었다. 당신이 주인공이며 학계의 가장 큰 어른이 되어, 그리고 사모님과 함께 박수받으며 제자들이 눈물의 추억담을 밝히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여느 정년퇴임 기념식이 아니었다. 



사랑방 모임 같고, 초임교수 축하식 같은

식순도 없고 둥그렇게 앉아 그냥 돌아가며 사랑방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선배 동료들이 그이와의 에피소드들을 회고하면 당사자인 당신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듣기만 하는 분위기는 이 자리가 정년 퇴임식이 아니라 마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그이의 초임교수 축하식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이가 10년 전쯤 정년기념식을 거창하게 치러드렸을 스승까지도 자리하여 그이의 대학원 시절을 회고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했다. 바늘을 찔러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게 단단히 무장한 단아한 학자 이미지는 사실은 부끄러움을 감춘 갑옷에 불과했음을 고백하는 자리였다. 항상 청년이고 싶어 했던 그이인지라 세월을 거슬러 보고픈 욕망도 숨기지 못하고 그 시간이 되면 통과의례처럼 하는 정년식을 갑자기 닥친 것처럼 당황하고 무척 쑥스러워했다. 


고향인 광주가 신군부의 총칼에 불타던 그해에 그곳의 국립대학 교수가 되면서 처절한 세월의 광주소식을 서울에 전해야 하는 밀사가 된다. 안락한 일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기득권의 성에 안주하는 서울사람들에게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면서 자주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신문과 방송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또는 재갈이 물린 시대에 그는 신문방송학 초임교수였다. 자유 정의를 외치던 젊은 날의 꿈이 거대 권력에 좌초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수록 그것은 거미줄로 엮은 그네를 타는 형상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비겁한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이의 운명이었다. 이청준의 소설처럼 젖은 옷을 입은 채 몸의 체온으로 말리면서 이 장엄한 세월을 대학교수로 견디는 일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자주 되뇌었다. 이성의 힘으로는 더욱 어쩔 수도 없는 역사의 막장을 보면서 부끄러움 속에 그이가 감추려 했던 무등산의 분노는 안으로 내연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말수가 적어지면서 표정은 굳어만 갔다. 가끔 바둑판 앞에서 바둑을 져주기도 하면서 씁쓸한 미소라도 유도해 보려 했고, 삶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위로해 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시대의 불화를 넘어 《한국언론사》 집필로

그러던 그이가 서울의 모교로 대학을 옮기고 3년이 지났을 무렵 원고지 3천 매 분량의 대작 《한국언론사》를 불쑥 내밀었다. 지난 10년 동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정리한 것이라고 겸손해했지만 이 책은 그때까지 언론사 연구논문이나 언론인 인물사 몇 편에 그쳤던 언론학계에 튼튼한 사관에 뒷받침된 통사로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저술이었다. 역사책을 집필하는 일은 오랜 시간 자료를 찾아야 하고 사관을 굳건하게 세워야 하는 일인지라 누구도 쉽게 덤벼들려고 하지 않는데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동안의 정신적 내홍을 이 책의 집필을 통해 혼자 다스렸던 모양이다. 답답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의 감옥에 자신을 유폐시켜 그이가 할 수 있는 고독한 저항의 몸짓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성불 직전의 환한 미소와 함께였다.

그 K 교수가 벌써 정년이다. 앞으로 광화문을 떠나 완도 보길도 해변에 마련한 초당에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문학청년의 꿈에 한창 부풀어 있지만 그 음모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한국의 언론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책무가 그이를 한가하게 고산 윤선도를 흉내 내며 유유자적하게 내버려 둘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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