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의병장의 꿈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작성일 : 2010-03-02   조회수 : 2078

언론 의병장의 꿈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삶의 시간을 어떤 단위로 나누는 일은 고비마다 매듭을 정해보고 싶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몸짓일지 모른다. 잠깐의 숨 고르기를 위해서거나, 스스로의 의미부여이거나, 문득 소외되지 않았음의 확인이거나가 그것일 것이다. 해서 회사창립 몇 주년 기념이거나 회갑, 고희, 희수, 팔순, 미수 등으로 살아 있음을 기념하기도 한다.


2009년 5월은 나남출판사가 창립된 지 30주년이 된다. 자축도 하고 싶고, 널리 알려 축하도 받고 싶은 마음은 한이 없었다. 그러나 이 일들이 갑자기 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출판 30년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하는 생각과, 요즘 들어 하나의 사기업에 불과한 우리 출판사가 어쩌면 얼마만큼은 공적 영역에 위치한 게 아닌가 하는 겸손까지 겹치는 생각 때문이어서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박한 회사 살림형편에도 뜻만을 살려 운영해온 '지훈상'이 벌써 공평무사하게 10년이 되어 아름다운 권위라도 세운 듯하고, 학술진흥재단 명저 번역사업에 국가기관보다 내가 더 제작비를 부담하여 100권을 목표로 80여 권이 3년째 출판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순영 편집부장이 회사 창립 30주년과 개인의 60회갑을 기리자며 이제까지 여기저기에 썼던 나의 글을 꼼꼼히 찾아내 편집하면서 여러 선생들에게 청탁했던 원고가 들어왔다. 김형국, 송호근, 김민환, 김인환, 오생근, 박명림 선생들의 정성 어린 글이 그것이다. 나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이렇게 긴 글을 주신 데에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할 뿐이다. 벌써 사고를 쳐놓은 뒤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잉크냄새와 활자에 중독된 나의 속세의 욕망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증명하듯 이 책을 꾸미는 일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발표한 글들이 대부분이고 신문 인터뷰 기사를 모으기도 했는데 꼭 책으로 내야 하는가 하고 망설이다가 축하원고를 보내주신 선생의 글들에 대한 예의에서라도 이 책 절반 이상의 글을 새로 쓰면서 여름 한 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메모장을 새삼스럽게 들추면서 단상(斷想)들을 정리하여 여러 편의 에세이로 만들었다. 박경리, 이청준 선생에 대해서는 긴 글이 되었다. 아무래도 인간관계의 연속들이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또는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을 시시콜콜 기록하여 공개함으로써 그 열정을 간직한 채 계속 타오르는 불꽃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1989년 나남 10주년 기념은 나남신서 100호 기념과 같이했다. 10년 동안 출판사로 버텨낸 것과 언론학 전문도서를 100권이나 낸 것을 자축하고 싶었다. 프레스센터의 기념식장에서는 젊은 출판장이의 열정을 축하하면서도 역마살이 낀 저이가 저 일을 계속할까 하는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았다. 나는 나남신서 1천 호, 5천 호의 위업도 달성할 수 있을 터이니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호기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나남신서는 벌써 2천 5백 호를 출간하고 있다.


1994년 창립 15주년 기념은 서초동 사옥마련과 함께 첫 번째 사옥의 집들이와 겸했다. 기뻤다. 번듯한 내 집을 마련한 것이다. 지하철 양재역과도 가까워 저자들이 출입하기도 편리해졌고 넓은 공간의 여유로움은 너무 좋았다. 이성원 교수와 영문과 동창생인 바둑친구 김동찬 사장이 뉴질랜드로 이민 가면서 고가의 그의 사옥을 나에게 떠넘기지 않았다면 꿈꿀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이와의 우정은 딸아이들의 교환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내 딸을 뉴질랜드 그의 집으로 유학 보내고 그이 딸을 내가 서울서 데리고 있기도 했다.


1995년에는 파주 통일동산에서 금촌 가는 길에 강희일 사장과 4천 평의 부지에 1천 5백 평의 현대출판유통을 설립하여 이젠 창고 이사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이렇게 사옥과 창고문제를 해결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출판사 뒷집의 영감님이 상속문제 때문이라며 100평의 땅을 떠넘겨 주었다. 힘겹게 증축공사를 마쳐 대지 200평, 건평 900평의 지훈빌딩이 되었다. 자금 사정도 빠듯하고 일할 시간도 벌 겸, 맨 꼭대기층은 이른바 펜트하우스 흉내를 내서 살림집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곳은 35년 전 대학 2학년 때 내 인생을 바꾼 광주(廣州)대단지 사건을 취재하러 동대문운동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가던 흙먼지 길가의 논밭이었던 말죽거리 그곳이 아닌가. 참 운명이다 싶었다.


번듯한 사옥을 완성하고 한숨 돌리려던 여유는 IMF 외환위기로 머리가 하얘졌다. 출판을 처음 시작하던 1979년 가을 새벽에 배달된 대통령 유고의 조간신문을 펴들 때 받은 충격은 비할 바도 아니었다. 어느덧 부양할 가족이 20여 명이 넘는 중소기업 사장이 되어 있어 어깨가 무거웠다. 멀쩡한 담보대출을 현금확보라는 미명으로 상환을 독촉하며 고율의 대출이자를 강요하는 하이에나 같은 은행에게 시달리고, 날마다 터지는 도매상과 서점부도의 악령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래서 6ㆍ25와 이 외환위기를 넘긴 사업가는 믿어도 된다는 말도 생겼다.


새천년이 시작하기 직전인 1999년, 창립 20주년은 계간 〈사회비평〉 10주년과 나남신서 700번으로 내 책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출판기념을 겸하였다.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 모인 저자분들이며 좋은 선배들인 600여 명의 하객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나남’과 어떤 사이냐며 기분 좋은 확인에 바빴다. 출판으로 얽혔지만 휴먼 네트워크의 질과 양이 이렇게 광대무변할 수 있음을 웅변하는 듯했다. 일본 덴츠(電通)의 신년하례식처럼 민간의 힘에 의해 이 시대 지성을 모일 수 있게 한 것 같은 절반의 성공에 스스로 감동했다. 대성황을 이룬 하객들 앞에서 언론으로서의 출판과 출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누누이 강조한 것은 이젠 피할 수 없는 출판장이로서 그 길을 가야 한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2004년은 창립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창립기념식 행사를 대신하여 6개월 동안 고생하여 목침 같은 46배판 1,120페이지 책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4반세기》를 발간하였다. 여느 출판사도 시도해 보지 않은 2천여 권의 총 도서목록과 해제를 실었다. 인쇄매체의 기록성을 담보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으나 6개월에 걸친 시간과 물량의 투입이 너무 힘들었다. 발간 도서의 집대성은 흐뭇했으나 옥(玉)에 낀 티와 같은 책도 많아서 엄격하게 정선(精選)하지 못한 안목과 치열한 자기검열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빠른 정보검색을 위해 CD도 별도로 제작하였으나 굳이 큰 책으로 출판한 것은 책이 갖는 공간성과 내 분신인 양 쓰다듬고 싶은 허영도 있었으리라 싶다.


2005년은 파주 교하의 출판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 하류의 기름진 퇴적층의 언저리로 한강이 임진강의 물과 만나 강화도를 돌아 망망대해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동업계 동무들도 사옥을 마련하여 1백여 개사가 도란도란 입주했다. 근 20년의 강남 서초동 시대를 마감하고 이 벌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550평의 부지에 세운 850평의 거탑(巨塔)이다. 비효율적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지하 2층 깊이의 넓은 창고도 같이 마련하여 흔들리지 않을 출판사의 기틀을 잡았다. 갈대 수로의 풍경과 함께 부드러운 곡선의 커다랗게 휘어진 바람의 벽을 두른 독특한 아름다운 모습은 이제 성균관대 건축대학원장으로 옮긴 자유혼의 디자이너인 친구 김영섭의 작품이다.


사옥을 장송(長松)으로 띠를 두르고 자작나무의 작은 숲도 마련했다. 넓은 바람의 벽에는 담쟁이를 올렸더니 벌써 절반 이상을 덮고 있다. 교통시간을 생각해서 별도로 서울 지사도 마련할까도 생각했지만, 꿀을 찾는 벌을 불러들일 문화의 진한 꽃향기가 이 거리 정도는 극복하지 않겠느냐는 고집으로 경기북도의 시골인 심학산(尋鶴山) 자락의 자유로(自由路) 연변인 여기에 올인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이제 나남창립 30주년이 되었다. 편견 없는 열린 광장의 지성의 열풍지대의 숲은 얼마나 갖추어졌는지 모르겠다. 숲이 무성해야 봉황(鳳凰)이 나래를 펴고 내려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남이라는 지적(知的) 저수지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의 맑은 물을 얼마나 받아들여 이를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보(洑)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성과 차이를 포용하는 해납백천(海納百川)의 나남출판이라는 용광로는 자유의 활화산으로 지금도 용솟음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의 또 하나의 30년을 준비하는 푸르른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라도 지난 삶의 궤적을 다잡아 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 책 《언론 의병장의 꿈: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30년》을 엮으면서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본 지난날의 글은 삶의 향기보다는 출판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려는 치열한 몸짓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의 성장통(成長痛)의 흔적들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팍팍함 때문인지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자기검열의 엄격한 잣대도 보이고,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적의도 잘 숨기질 못해 들키는 생경함도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호기롭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30년 동안 이러한 주장의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절반이나 실천하였을까 싶다.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향에 몸을 숨기고 사는지도 모른다.


언론매체에 투영된 내 모습 몇 편도 함께 실었는데 중복된 내용도 있다. 1980년대 중반 이제는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이 된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가 언론학 전문출판사의 등장이라고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한 것 같다. 이후 1990년대 이한우 기자의 보도에 이어 최근의 두 면에 걸친 집중취재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문갑식 부장의 기사가 눈에 띈다. 나의 투박한 목소리를 그들의 시각에서 게이트키핑하기도 했지만 여기저기서 살아 있는 내 모습을 객관적 시선으로 보는 듯하여 반갑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하다. 그러나 차츰차츰 세상에 눈을 뜨고 실천하는 나의 성장과정을 보는 듯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뒤에 붙였다. 지훈상 제정 무렵, 이젠 고인이 된 〈중앙일보〉 이헌익 기자의 ‘인물오디세이’ 취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행간에 배어 있는 애정 속에 흔들리지 말고 세운 뜻에 공인의 자세로 매진하라는 비수 같은 질책도 숨어 있었다.


15년 전의 언론학 박사논문의 결론을 요약하여 실은 것은 언론으로서의 출판의 기능과 역할은 내 삶의 존재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며, 30년 출판업이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며 앞으로의 다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생뚱맞게 바둑 기보가 실린 것도 내 나이테의 어느 부분을 강하게 할퀴었던 아련함 때문이라고 접어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나남 초대주간’이 자랑스럽다는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출판동네의 사랑하는 아우 윤백규 사장의 발문에 가슴 뿌듯한 고마움을 보낸다. 그리고 이 책을 아름답게 디자인해 준 이필숙 실장에게 감사드린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30년이었다. 5년 전 주역(周易) 공부를 하면서 남동원(南東園) 스승께서 나에게 주신 호가 ‘구원’(衢園)이었다. 대축(大畜) 괘의 ‘何天之衢 道大行也’의 뜻을 주신 것이다. ‘荷天之衢’(하천지구)는 천상의 사통팔달하고 무애무변(無헆無邊)한 도(道)를 짊어지다, 또는 완성한다는 너무 큰 뜻에 다름아니다. 내가 꿈꾸는 언론 의병장의 꿈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다.

2009년 삽상한 가을바람의 얼굴을 보며
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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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무렵 '나남'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누군가의 시집을 받아 읽었다. 그것이 나남과의 첫 만남이었다. 언젠가 하동 평사리 토지문학제에 심사 갔다 나남에서 집대성한 21권의, 박경리 선생의 <토지> 전집을 보고 마음에 쏙 들어 그 자리에서 전화 주문을 해서 샀다.

그 사이 나남에서 나온 책의 공동 필자가 되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나남이 후원하는 지훈상(문학부문)을 받았다. 지훈상은 지훈 선생님 사모님이 친필로 상장을 써주셨다는데 그해는 몸이 불편해 조상호 나남 대표가 붓글로 쓴 상장을 받았다. 제법 긴 세월 나남과 인연을 맺어온 셈인데 그동안 나남이란 뜻을 몰랐다.

조 대표가 쓴 <언론 의병장의 꿈>을 읽다 나남이란 '나'와 '남'이 책을 통해 하나가 되는 '우리'라는 뜻인 걸 알았다. 사진 찍는 친구 김석중이 아(我)와 타(他)가 하나라는 '아타'를 자신의 예명으로 삼았는데,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나남이 아닌가. 나남은 포천 신북에 16만 평의 숲을 꾸미고 있다고 한다.

책을 내거나 출판을 하는 사람은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책의 몸이 나무에서 왔으니 자기가 쓴 종이만큼 나무를 심어 갚아야 한다. 이것도 나남이 강조하는 자연채무(自然債務)와 같은 뜻일 것이다. 책이 쏟아지는 시대, 숲을 가진 출판사가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언제 그 숲에 가보고 싶다. 나무 몇 그루 심고 싶다.
[정일근 시인 / 한국일보 2010.3.26. 길 위의 이야기 : 출판사와 숲]

 

나남출판  |   2010-03-27 08:49:00  |   댓글  |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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