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보스 청년 오생근
작성일 : 2006-08-21   조회수 : 1614

오생근 깊이읽기 | 2006, 문학과 지성사

 

우리의 보스 청년 오생근

 

 

젊은 날은 잠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아! 보병 8연대’의 젊음은 오생근 병장과 잡았던 따뜻하고 큰손이 울림과 떨림으로 남은 삶을 지배할지는 몰랐다. 그때 우리는 젊었고 ‘희망의 나라’로나 ‘아침이슬’이나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적근산 방책선의 살을 에는 칼바람만큼이나 가진 것 다 뺏겼어도 명징함 자체였다. 오생근은 오늘날의 불문학의 대석학 꿈을 미처 꾸지도 않았고, 장성규는 파리의 주재원을 거쳐 세계적 기업인 스타벅스의 서울 사장을 꿈꾸지도 않았고, 박원철은 미국변호사를 꿈꾸지도 않았고, 나는 4반세기를 잘 나간다는 출판사 사장을 꿈꾸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백두대간의 울울창창한 고지들 틈에서 손수건 한 장 넓이의 파란 하늘을 자유의 가슴에 품었으면 행복했다.


1971년은 박정희의 군부장기집권을 완성시킨 이른바 10월 유신의 한 해 전이다. 10월 15일 군의 탱크에 대학이 짓밟힌 위수령으로 제적학생이 되었다. 김상협 총장의 말씀처럼 “하늘을 쳐다보고 물어봅시다.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땅을 치고 물어봅시다.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목을 빼고 통곡해 봅시다.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의 처절한 울분 속에 자유의 제단에 바쳐진 피를 뿌리는 21마리의 양의 하나가 되었다. 전국적으로는 180명의 동지들이 함께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태양의 길을 달렸는지 일제 36년의 기나긴 질곡이라는 36년의 세월이 흐르면 그때의 그 대학생은 중년을 넘긴 어른으로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는다. 또 그날이 문화의 날인 10월 셋째 토요일인 10월 15일이다.


도피생활은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를 되뇔 만큼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원주 무심천 주변의 넝마주이 생활은 거지왕자의 꿈을 꾸기도 했다. 강제입영한 논산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의 공허한 허기를 삼립크림빵으로 때우며 우리가 떠난 대학의 문이 다시 열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구좌절은 없습니다. 영구절망도 없습니다. 칠전팔기의 새 전진만이 있습니다. 다 함께 미래의 역사를 굳게 믿고 현재의 곤경을 참고 견디어 나가는 용기와 아울러 자존과 자애를…”이라는 울음을 삼키는 함성을 바람결에 들어야 했다.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지성인으로 거듭나려던 푸른 꿈의 젊은이는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군인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이제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유소작위(有所作爲)의 장정 길을 나서야 했다.


나라의 땅이 그렇게 넓은 것을 W 백을 메고 방책선 가는 길에서야 알았다. 동지섣달의 강원도 칼바람만 추운 것이 아니었다. 반정부 학생세력이라 낙인찍고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보안부대원의 눈초리와 함께 어디까지 왔는지, 또 한참을 더 가야 하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막막함이 더한 추위에 떨게 했다. 7사단 8연대 대기병 막사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는다. “그래,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이등병에게 존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처음 본 오생근 병장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형도 이 첩첩산중에서 사람이 그렇게 그리웠던 모양이다. 동기 간 육친의 정이 듬뿍 밴 모습이 산적의 보스 그대로였다. 그러나 형은 입대 전에 이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최초로 “이상의 상상적 세계”로 입상한 문학평론가였다.


나는 감시를 편하게 하려는 군정보기관의 편의대로 최전방 선임소대 선임분대 3번 소총수가 되었다. 철책선 근무라는 것이 어쩌면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단절된 인위적인 태고의 정적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제된 로빈슨 크루소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아니 6개월이라는 시간이 얼마만큼의 기다림과 기대와 안달인지를 갑자기 깨닫는다든가, 편지를 쓸 때는 내가 아는 지식들이 얼마나 모래 위의 집처럼 내 것이 아닌 허위의 지식들이었는지를 절감하곤 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후방의 연대장실에 근무하던 우리의 보스 오생근 형이었다. 그러나 철책선에서 형을 만나러 연대에 나가는 기회는 쉽지 않았다. 안경을 바꾼다고 나왔다가 잠깐 들르거나, 근무 서다가 친구가 보낸 현대인에게 주는 편지 책을 보다가 걸려 영창살이하러 가다가 만나 볼 수 있는 경우가 고작이었다. 그 짬을 살려 우리는 터지는 봇물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고지에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연대장실에서 푹 삶은 닭을 그렇게 맛있게 뜯으면서도, 제대해서 이것이 생각난다면 씁쓸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한 번은 결혼한 농촌사병의 휴가 가는 일이 서무계의 농간으로 꼬이자 대뜸 가죽장갑을 끼고 야구방망이로 책상을 박살 내며 민초의 애로사항을 해결했다. 형은 우리의 정의의 보스였다. 그 무렵 눈사람과 같이 찍은 흑백사진에 늠름한 산적 모습 그대로 남아 잊히지 않는다.


1978년 여름에 형의 첫 평론집 발간을 앞두고 충북 진천의 산골에 전우들이 모였다. 형이 항상 대통령감이라던 조희부가 귀농하여 한참 농사일에 재미를 붙이던 때 우리는 보스의 책 제목을 지으려고 머리를 맞댔다. 결국 《삶을 위한 비평》으로 낙착되었다. 형은 그 전해 11월 1천3백 명이 죽거나 다친 이리역 폭발사고의 현장을 다녀온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했다. 나는 뉴스로만 지나치며 일상에 빠져 있는데 형은 그 먼 곳 현장까지 가서 행동하는 지성을 실천했구나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군사독재체제에서 살아남으려는 몸짓이거나 지성의 우회로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는 출판사가 직업으로 자리 잡을 무렵이었다. 바로 금서가 되었지만 5백 쪽이 넘는 당시로는 큰 책이었던 《새로운 사회학의 이해》를 자랑스럽게 여기저기 소개했던 형은 항상 가진 것이 없는 나에게 무언가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 결실이 ‘나남문학선’이었다. 형이 편집인을 맡아 “우리 시대의 모순을 포착하여 문학을 형상화시키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끈기 있게 계속해온 치열한 정신의 작가들이 나남문학선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이청준에서 시작하여 황동규, 김현을 거쳐 이문구까지 40명의 문학선을 꾸며 주었다. 문학에의 개안을 시켜준 형의 애정에 항상 감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를 형이 소개한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조악한 번역판이 횡행하는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어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성의 역사》 3권을 번역게 했고, 스테디셀러가 된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번역하여 3년 만에 출간할 수 있었다. 이 책은 10년이 지나 독자들과의 약속이라며 오역이나 미흡한 부분을 다시 손봐 새로 책 한 권을 다시 내듯이 개정판을 출간한 것은 형의 진실성과 함께 항상 청년의 기상이 식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나도 60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청년인 보스를 따라가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느낀다. 4년 동안 숱한 토론과 땀내음 속에 완간한 9백 쪽 가까운 대작 《광기의 역사》 표지에는 ‘이규현 옮김 오생근 감수’라 써 있다. 감수한 선생 이름을 굳이 역자 뒤에 넣은 것도 보기 드문 제자사랑의 본보기로 형의 무변대한 그릇을 촌탁하기 어렵게 한다.


공중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내 아들이야기를 그렇게 부러워하더니 늦둥이, 아니 ‘희망둥이’ 오달지가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작은 청년 오달지가 군대 가는 날에 들려주어야 할 아버지의 청년정신의 이야기를 아껴두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글을 맺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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