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이렇게 맞자
작성일 : 1999-09-12   조회수 : 1256

동아일보 | 1999. 9. 12.

 

새천년 이렇게 맞자

 

 

시간의 흐름에 매듭을 지어 새천년을 굳이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과 미지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모른다. 특히 우리는 천년 문턱의 언저리에서 경제환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냉엄한 세계 시장논리 속에서 한 국가사회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새삼스레 실감한다.


정신의 황폐화를 담보로 천민자본주의만을 추구해 온 우리 사회는 봉건적 선민의식의 책임 없는 거대담론에만 휘말려 ‘작은 진실들’의 가치를 등한시했다. 우리에게 문제는 늘 자신만은 예외로 한 ‘정직하지 못한 사회’였고 그들만의 ‘삼류정치’였을 뿐이다. ‘나’라는 한 개인이 바로 그러한 사회와 정치를 형성하는 하나의 요인이라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모든 분야에 만연된 뿌리 없는 허황함과 욕망의 과잉에 대해 면책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건강한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그러한 공동선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고통스러운 축제의 현장에 뛰어드는 용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이란 단지 구두선(口頭禪) 같은 ‘개혁’ 캠페인으로서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더욱 저변에 깔려 있는 ‘문화’의 측면에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한다. ‘문화’는 인격의 형성과정이 그러하듯 짧은 시간 안에 그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힘들다. 내세우지 않고 진득하게 견디는 힘의 축적이야말로 가장 시급하다.


새천년의 문턱에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라 하여 선구자를 자처하며 허투루 길을 내어서도 안 된다. 뒷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조국광복의 대장정에서 결단하실 때마다 애송하였다는 서산(西山)대사의 시구가 그것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눈 덮인 광야를 지날 때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정신문화 영역의 일각을 담당하는 출판인으로서 미지의 세계를 내딛는 가슴 설레는 긴장을 억누르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한 새천년을 내딛는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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