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사회화 시대의 출판
작성일 : 1997-07-01   조회수 : 1279

BOOK & ISSUE | 1997. 7.

 

정보사회화 시대의 출판

 

 

질서는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공동체의 선(善)을 지키기 위한 질서의 뒷마당에는 치열한 책임과 양보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출판 공동체의 조그만 질서구축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 이런 꿈을 꾼다.

아침,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전국의 도ㆍ소매 서점을 연결하는 통합전산망에 접속한다. 최근 우리 출판사가 출간한 몇몇 신간들을 검색한다. 공들여 만들기도 했지만 독자의 변화를 이끌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서 매출에 기대를 거는 10여 종 정도의 책을 지정하자, 제목들이 좌측에 뜨고 우측에는 총판매량과 함께 막대 그래프가 모니터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막대 그래프가 조금씩 용트림을 하면서 숫자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내가 세상에 내놓은 상품이 팔려 나가는 것을 실시간(實時間)으로 관찰한다. A라는 책의 매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이 A라는 책을 지역별로 관찰한다. 갑자기 부산에서 이 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범위를 좁혀 거래 서점별로 본다. 부산의 B서점에서 A책의 매상이 두드러지게 증가한다. A책이 부산 B서점에서 갑자기 팔려나가는 이유를 영업부장에게 확인해 본다. 현재 B서점이 A책의 주제와 관련된 특집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상쾌한 아침의 시작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현대적 영업, 과학적 마케팅의 기본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출판계의 현실은 아예 통탄스러울 지경이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종이책의 운명을 걱정하고 디지털을 기반으로 둔 뉴미디어의 화려한 정보사회를 꿈꾸는 우리가, 매일 발생하는 기본적 물류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얼러치고 메치고 밀고 당기는 전근대적(前近代的) 주먹구구식 운영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란 얘기다. 우리의 문화는 이미 탈근대를 논하고 있는데 정작 문화산업의 당사자들은 아직도 전근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아이러니의 역사, 위선의 역사를 유지ㆍ재생산하는 시지망월(視指忘月)의 바보동네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업자들과 서점의 지급담당자들은 흔히 정확한 재고 부수와 판매 부수가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달라’, ‘못 준다’를 반복하며 지급 액수를 가지고 실랑이를 한다. 이 같은 주먹구구식 거래의 폐해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재기나 협잡에 의한 베스트셀러의 조작을 가능케 하고, 도매상에 책 밀어 넣고 받는 선어음으로 왜곡된 거품 경기를 초래한다. 도대체 정확히 몇 부가 팔렸는지,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런 상황은 잘못된 중복 거래로 인한 과잉생산을 유발할 뿐 아니라 급기야는 유통구조의 붕괴를 몰고 올 수도 있다.

출판의 형이상학적 측면만 부풀린 문화산업 운운하는 것도 사실은 구태의연한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변형된 권위주의는 아닐까? 하여 이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의 맹점을 파악한 악의적인 도매상들이 출판계가 모두 이런 줄 알고 뻔뻔스럽게 나와도 책임을 추궁할 길이 없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이다. 심지어는 “나 죽으면, 너희도 죽어”라는 협박까지 덤으로 받는다. 그런데도 개전(改悛)의 노력 없이 타성에 젖어 또다시 주먹구구식 죽음의 행진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지난 IMF 경제환란 때 그렇게 경을 치고도 최근 어떤 출판사들은 도매상의 부도에 또 수십억을 물렸다. 이상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우리 시대 출판계의 자화상이다.

요즘은 웬만한 구멍가게에서도 바코드로 물건값을 뽑고, 하루 매상, 한 달 매상을 한눈에 확인한다. 책이라고 해서 이렇게 못할 이유는 없다. 누구나 쉽게 통합전산망에 접속하여 판매시점(Point Of Selling)에서 유통의 흐름을 파악하고 매출과 재고를 확인하고 정확한 지급액수 뽑아내고 재판(再版)계획을 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가장 앞서가도 시원치 않을 우리의 위대한 문화상품인 책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모든 매출의 비밀이 서적상의 캐시박스 속에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심지어는 그 캐시박스의 주인조차 그 비밀을 모른다. 왜 우리는 이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전근대를 살아가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물류유통의 근대화 내지는 합리화가 말처럼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력이나 자금력이 아니라 출판 전후방산업의 마음가짐 아닐까? 서점이든 출판사든 이제까지 그런대로 잘 해왔는데 새삼스레 돈 들여가면서까지 매출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매출이 너무 많으면 세금이 두렵고, 매출이 너무 적으면 자신의 왜소함을 확인하는 것 같아 그저 적당히 세금 줄여 내고 체면치레하는 것이 익숙한 행복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비합리적인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공동체의 질서를 하향평준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미 도래한 정보사회를 애써 외면하려는 그러한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주식시세의 변동을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모니터하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우리가 원하는 출판유통 과학화도 의지가 있고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현재의 기술력과 자금력으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21세기가 꿈꾸는 자의 시대라면 우리는 우선 이런 꿈부터 꿔야 한다.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듯이 그래도 아름다운 질서가 있는 우리 출판 공동체를 정보사회에 튼튼히 뿌리내리게 하는 통합전산망의 구축은 아무리 서둘러도 그렇게 이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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