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작성일 : 1991-10-15   조회수 : 1482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 1991. 10. 15.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해마다 10월이 되면 끊어진 필름처럼 캠퍼스, 군인, 정보부, 박정희, 열차, 방책선, 철모, 허기, 추위, 원시림 등에 대한 분노와 좌절 속에 청운의 뜻과 소시민적 현실의 굴레가 교차하는 내출혈을 20년 동안 앓으면서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 가을이 주는 계절의 감각인 코스모스 키만큼의 공허함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가을의 결실을 위한 봄, 여름의 땀 흘림이 부족한 것에서 오는 것도 아닌 이 가을만 되면 찾아오는 내출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주위의 혹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아니다. 불혹은 누가 유혹하지도 않는 세월이다. 해서 선택의 자유조차 없어진 지금, 이 길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짐짓 의젓한 체하며 열심히 가야 하는 그런 나이테이다.


고질이 된 가을의 내출혈은, 1971년은, 스물두 살의 자서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4월엔 경북대학의 전국남녀대학토론대회에 갔다. 초행길인 대구 시내 길을 동대구 경찰서 사람들의 별난 환영 때문에 경북대 학우와 부지런히 달리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을 해야 했다. 김지하 선배의 《오적》(五賊)이 불온문서로 취급당하던 시절이었으니 쫓기면서도 전해에 명동 입구의 흥사단 민족학교에서 잡았던 크고 부드럽고 따뜻한 김지하 형의 손의 체온이 계속 뒤따라와 혼자 웃고 말았다.


나중에 민관식 문교장관이 지하신문이라고 거룩한 이름을 붙여 준 〈한맥〉의 신문제작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학교 앞은 보안을 지키기 어려워 주목을 받지 않는 경희대 앞에서 등사기로 ‘신문’을 밀었다. 밤새 필경을 긁고 발행 부수가 자꾸 늘어나면서는, 등사원지가 흐물흐물해져 다시 양초 불로 굳혀 등사판을 밀면서 제작한 잉크냄새가 밴 따끈따끈한 ‘신문’을 한 아름 안고 홍릉을 넘어 뛰어오면 등굣길의 학생들이 10원을 내고 다투어 가져갔다. 제도언론에서는 감히 다루지 못한 기사가 넘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 못 자고 허기진 아침의 새 햇살과 나누는 즐거운 고통의 축제의 나날들이었다.


한 차례 광화문 여왕봉 다방에서 서울법대 〈자유의 종〉의 이신범 형, 연세대 〈새나라〉의 김건만 형과 함께 전국대학 연합신문을 내자고 얘기하던 일도 위수령 얼마 전의 일이다.


사법부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전국판사들의 사표파동에 이어 여름방학이 미처 끝나가기 전 광주대단지 사건이 터진다. 지금은 호화판 분당 신시가지보다 더 서울에 가까운 대도시가 된 성남이지만 그땐 동대문운동장에서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로 먼짓길을 두 시간 남짓 달렸다. 그때 지나던 말죽거리 국도변이 지금의 출판사 사옥이어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감회가 새롭다.


당시 개발의 연대에 맞춘 군사문화 전시행정의 극치로 서울 시장은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청계천변의 판자촌 철거민을 집단이주시키는 명목으로 서울 주변에서 제일 값이 싸다는 이곳에 그냥 내동댕이친 것이다. 선배들과 함께 현장조사에 나선 것은 사건이 터진 3일 후였지 싶다.


산업화의 시작은 도시빈민 노동자들의 허기와 부서져 내리는 삶을 항상 담보로 해야 하는지, 소비가 미덕이라는 조국근대화의 음덕은 여기만은 예외였다. 윤흥길 소설가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묘사한 광주대단지는 오히려 낭만적이었다.


남이 장군이 호연지기를 부리며 활을 쏘고 말을 달렸다는 전설이 서린 소나무 앞에 섰다. 이 소나무에 청계천 주변의 인쇄공이었던 한 가장이 아내가 허기에 지쳐 실성하여 갓난아기를 삶아 먹었다고 하여 목을 매 자살하였다고 하는 이장의 생생한 증언에 우리는 치를 떨었다.


〈한맥〉 신문(?)에 “이런 유언비어가 돌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고 직접 보고 들은 현장을 오히려 걸러서 광주대단지 르포를 꾸몄다. 이 기사가 이북의 신문에 남한의 실상으로 과장보도 되었다는 사실은 제적당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것이 내가 내출혈을 시작해야 하는 제1장 제1과였다. 촛불의 촛농과 등사 잉크냄새에서 시작된 신문 인쇄잉크 냄새의 아릿한 최면과 투지가 어느덧 중추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을 하늘은 그렇게 높고 파랗기만 하였다. 덕수궁의 국화전시회에는 황국(黃菊)의 그윽한 향내로 숨 가쁜 피신자를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세계로 시공을 정지시킨다. 학교는 어찌 되었는가.


9월 말부터의 피신 생활이 만만치가 않다. 대륙의 밀사처럼 통행금지가 풀리자마자 광화문 시민회관 뒤에 집현각 술집을 경영하던 이동규 선배에게서 소개장 하나를 들고 원주행 기차를 청량리에서 탄다. 원주천에서 뒹굴며 박세희 군과 함께 넝마주이로의 이력을 쌓는다.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와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의 도피》는 내용과는 관계없이 그 제목만이 무슨 명제처럼 이때 머릿속을 빙빙 돌며 떠나지 않는 걸까.


15일 아침, 학교 앞을 7번 버스에 앉아 지난다. 학교 정문을 옮기는 공사 중이어서 학교운동장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장면이 지금 실제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 공수부대 복장의 군인들이 학우들을 군홧발로 개 패듯이 하며 뒷머리에 손깍지를 끼게 하고 중앙도서관에서, 시계탑 건물에서 줄줄이 운동장으로 적군의 포로처럼 긁어모아 꿇어 앉히고 있다. 눈물만 삼키는 왜소함에 분통이 터진다.


어떻게 구한 신문인지는 모른다. 그냥 신문이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위수령 발동’, 박정희 얼굴이 퍽 사진발이 잘 받았구나. 제적학생 명단 순위가 〈동아일보〉에는 내가 4번째인데 〈중앙일보〉에는 왜 6번째일까. 기역니은 순서인가? 학년 순서인가? 주모자 순서인가? 를 장난질 삼아 셈해보고 있는 자신을 그 가을의 햇살 속에서 발견한다.


이런 날이 며칠인가 지나갔겠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학교 앞엘 갈 수밖에 없었다. 더 도망 다닐 회로도 꽉 막혀 있어서였겠지. 교문 앞의 장갑차가 신기하다. 호(虎)다방에서 법대 친구들이 껴안고 울음을 터트린다. 우리가 수경사에서 이렇게 맞았는데 너는 어떠했겠느냐고. 이제부터 군홧발에 채이고 야구방망이에 내 몸을 맡겨야 할 전주곡을 너희들이 했구나.


춥다. 통일화 속의 내 발은 제자리에는 있겠지. 얼어붙어 있으므로 그리고 나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군복은 겨울엔 절대로 따뜻하고 여름엔 절대로 시원하므로. 그러나 춥다. 산속의 눈길을 고속도로 달리듯이 하는 군용차량의 호로 속에 휘몰아 들어오는 눈발은 참 곱기도 하구나 하면서 이렇게 넓디넓은 국토를 북상하고 있다. 몸에 맞지 않은 군복의 이등병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더 이상 북상할 길이 없다.


방책선은 이마에 차다. 이 방책선이 3년간의 나의 벗이어야 했다. 논산 26연대, 103보, 7사단 8연대, 1대대 3중대 1소대 3번 소총수. 오생근 병장이 주신 어느 시구절이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다. 방책선을 붙들고 태고의 음향을 간직하며….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오늘 밤에도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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