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갯벌에서
작성일 : 1995-02-09   조회수 : 2345

현대문학 | 1995년 2월호

 

시간의 갯벌에서

 

 

치통은 항상 예고 없이 온다. 어제부터 간헐적인 치통에 시달리면서 이 고통의 축제에 동참할 준비를 한다. 야성이 갈기를 세우고 출판일을 치달을 때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경계신호로 치통은 항상 예비되어 있다.


건강상태에 대한 최초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이때쯤이면 일상의 일을 훌훌 털고 초연하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의 묵시록을 찾아 길 떠날 준비에 마음이 바빠진다. 그것이 남도의 황톳길이거나 내설악의 호젓한 산길이거나 아니면 해외 나들이라면 더욱 여유를 부릴 수 있기도 하나, 우선을 길은 떠나고 볼 일이다.

나만의 경험만은 아니겠지만 우리 40대 후반이 갖는 삶의 궤적은 지성이 나래를 펴는 청소년기를 한 대통령 사진 밑에서 보내야 했다. 이 나라에서는 군사독재 타도의 학생운동이나 민주사회 쟁취를 위한 시민운동을 위해 젊은 20~30대의 몸값이 꼭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활의 굴레 안에서나마 민주시민 연습을 열심히 하면서 이른바 성실한 사회의 중견 나이테를 두르게 되었다. 우리에게 산술적인 의미가 아닌 정신 성장사에서 새로운 21세기는 우선 이 암울한 군사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일이어야 했다.

그 하나의 몸부림으로서 잠시라도 이 반도를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여행인들 어떠랴. 많은 친구가 스스로 일에 중독되는 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첩경이라고 자학하면서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무역상사의 첨병으로 세계를 누볐다. 이것도 자유에서의 도피라고 애써 위안하면서 해외 현장의 나들잇길을 부지런히 뛰었다.

1989년 가을 유럽 여행 중에 운 좋게도 20세기를 광풍의 이데올로기로 몰아쳤던 공산 이데올로기가 동유럽에서 한 세기의 석양 속에 묻히는 베를린 광장의 열풍에 취하기도 했다. 하이델비르크 고성의 삽상한 추색(秋色) 속, 황제의 날씨 아래 드러난 철학자의 오솔길을 따라 시간이 멈추는 그 품에 안기면서 조금 전에 보았던 고성 지하실의 단두대와 고문기계들의 피 묻은 권력의 모습을 떨쳐버리려 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 예술가 묘역 중앙에 역대 대통령 대여섯 분을 한 무덥에 합장(合葬)시킨 그들의 지혜에 감탄했다. 지금도 원형 그대로 군림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만한 셴부른 궁전에서는 서부 유럽 몇 나라가 주축이 된 권력 놀음을 주눅 들어가며 열심히 외워야 했던 서양사 시간의 까까머리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산길을 힘들게 넘는 기차 안에서 사회주의 헝가리의 입국 허가를 표시하는 붉은 스탬프를 받았다. 시내 관광버스에 의지하여 수도 부다페스트로 가로지르는 잔잔한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대학 영문과에 유학하고 있는 금발 미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여기가 6백 년 전 칭기즈 칸 몽골군대의 말발굽에 폐허가 된 수도원의 자리라고 비장하게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몽골의 초원에서 바로 여기까지, 그 먼 거리를 대륙에서 대륙으로 정복의 대장정을 한 늠름한 칭기즈 칸에 대한 내 꿈속의 그림과 새삼스럽게 어머니로부터 이 세상에 내던져졌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내 엉덩이의 몽고반점이라는 대륙의 문장을 가슴 뿌듯하게 겹쳐보았다. 


꼭 손에 쥐여 주어야 알아차리는 우둔함일지라도 일찍이 여기를 왔어야 했다고 되뇌는 개안(開眼)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주눅 들었던 마음을 대반전시키는 통쾌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동안 미국대륙을 횡단하면서 그들에게 오랫동안 양육되어 부지불식간에 몸에 익숙해진 양키문화를 외국문물의 전부인 양 편안하게 즐기는 것이 고작이었던 모습이 그렇게 왜소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쯤에서야 비로소 나는 몇십 년 동안 가위눌림 당한 내 마음의 빗장의 정체를 눈치채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대륙의 기상을 받아 한반도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슬픈 인식이다.

국토 분단은 서울에서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 국경을 넘나드는 대륙에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다. 우리에게 외국에의 출구는 50년 전부터 오로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김포 공항뿐이었다. 만주로 가는 육로나 항구를 출발하는 바닷길은 모두 막혔다. 부산에서 배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서 출발하던 일도 멈추어 버린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섬에서 이제까지 자란 것이다.

우리 세대는 일제의 질곡을 이겨낸 광복의 아침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어머니의 등에 업혀 전쟁을 구경한 것밖에 없었는데 민족분단의 멍에는 온통 우리에게 떠넘겨져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몇 대 선조의 족보를 아버지한테 무릎 꿇고 배우고, 만주대륙을 말 달리던 독립군 선구자를 기리고,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을 외우고, 못난 짓은 섬나라 근성이라고 남을 헐뜯기도 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섬나라의 신민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배운 지식 따로, 치차가 제대로 물리지 않는 위장된 40여 년의 뒤뚱거리는 정신에서 나의 치통은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선천적인 고통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단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나그네의 행장을 꾸려 자신을 벗어날 빌미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의 하는 일이 취미고 여가며 혹은 종교이고 삶의 전부라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더욱 치닫기 위해서라도 예비해 두어야 할 또 하나의 일이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와 정보사회의 사냥꾼으로서 행여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빠야 한다는 채워지지 않을 탄탈로스의 갈증으로 무장된 우리가 스스로에게 허허롭게 알몸을 드러내기가 쉬운 일일까마는 가끔은 일부러라도 그래야 한다. 대륙의 광활한 초원이 아니더라도 시간의 갯벌에나마 주저앉을 일이다.

갑자기 이 시간의 갯벌을 만날 일이 있었다. 지난 연말 바쁘게 한 해를 갈무리하던 중에 난데없이 뉴질랜드로 이민 간 친구의 상쾌한 꼬임에 짐짓 빠져 처음 저지르는 황홀한 실종을 꿈꾸며 그가 사는 한여름의 오클랜드 해변으로 갔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하늘과 햇빛과 물과 초원이 이러했을까 싶은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 그대로의 환경과 이를 인간다운 삶의 질서로 승화시키려는 이들의 노력을 지켜보면서 이민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까다롭다는 이 나라의 자존심을 이해할 만했다. 그것은 서울에서도 괜찮게 살 만큼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가진 친구네들이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핑계 삼아 귀족이민이라는 눈총을 받으며 서울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떠나 이 먼 나라에 와서 찾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언뜻 짐작되게 하였다.

새해의 첫날 떠오르는 희망과 꿈의 태양을 이제까지처럼 엄동설한 추위 속의 산마루에서가 아니고 오존층마저 건너뛰며 숨 가쁘게 내려꽂히는 원시의 햇살 속에서 맞았다. 또 한 해를 어떻게 꾸려나가나 하는지. 망연히 파도에 씻기는 까만 모래의 푸르름인지 바다의 푸르름인지에 눈이 시리고 만다. 여름밤 해변가에서 햇빛에 잘 그을린 얼굴로 정월 초하루의 떡국을 먹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박한 생각은 꼭 이렇게 먼 거리를 날아와 확인하는 수고를 거친 뒤에야 시간의 유쾌한 배반을 안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활짝 열리지 않은 가슴의 깊이를 헤아려볼 수 있으려면 또 얼마만큼의 나그네 모습을 꿈꾸어야 하고 또 몇 차례의 예고 없는 치통을 앓아야 할지도 모른다. 행복하게도 나처럼 치통을 겪지 않는 건강하다는 회색의 도시인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함은 괜한 염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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