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하는 마음
작성일 : 2002-05-03   조회수 : 2218

출판하는 마음

 

 

누가 영속되는 시간의 허리를 붙잡아 토막을 내고 의미를 부여했는지 모르지만 새해 새 아침이 주는 계절의 감각은 항상 이마가 시리도록 새롭다.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오늘 밤에도 가야 할 먼 길이 있는 사람에게는 새해 새 아침이 주는 꿈과 바람이 견인차(牽引車) 역할을 해서 더욱 좋다.


출판문화를, 한 사회가 사회를 성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환경감시와 문화전달기능과 언론형성의 효과를 갖는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큰 줄기에 접속시켜 보면 출판인이 갖는 자긍심이 조금 돋보여도 좋겠다. 흔히들 출판사를 등록하는 일이 가장 쉬우며, 책의 기획ㆍ제작이 어려운 일이라 하나 책을 판매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고, 더더욱 힘든 일은 출판사가 그 출판사로서 견디어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문화와 경영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한 가슴에 껴안고 가슴앓이하기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어서일 것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쓰다가 신물이 나면 퉁소를 불고 생솔가지 타는 내음, 낙엽 타는 내음에 묻혔다가 꽃 피는 소리, 비바람 냄새에 마음을 닦고 살아가고픈 우리들의 소롯한 꿈인 선비의식과, 단돈 십 원을 보고 천 리 물길을 가야 하는 치열한 자본주의의 상업성을 함께 가져야 하는 출판문화의 내재적인 속성이 그것이다.

출판이라는 문화의 속성과 출판사를 경영해 나가야 하는 이윤추구의 기업적 속성을 어떻게 상호 보완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좋은 책의 출판을 통해 문화창조의 일익을 담당해야 하는 출판문화의 본질에 수렴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쓰는 용어를 빌어 얘기하자면, 각각의 서로 다르느 모순이 어떤 현상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할 때, 서로 다른 모순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이를 때 모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다고 하는 비적대적 모순을 어떤 방법으로 슬기롭게 풀어 헤쳐나가야 하는가는, 이제 문제 제기의 단계를 넘어 오늘의 출판문화가 직면하고 있는 현안 문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기업의 성격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좀더 좋은 책을 만든다는 출판의 본질을 변증법적으로 상호융합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여기에 오늘 출판인들의 고통이 존재한다. 그 고통은 막대한 물량의 비디오, 시청각 메커니즘과 대결하는 가운데, 더욱 적극적인 대응양식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출판문화는 뉴미디어의 발달로 대중문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텔레비전과 신문, 방송 대량 메시지 전달방식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활자매체의 내재적 한계 자체를 장점으로 승화시켜 그 사회를 건전한 사회로 이끌어 나갈 가치 덕목을 텔레비전, 방송보다는 영구한 기록성으로 그리고 신문매체보다는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영역의 광역화한 심층화로 이들 뉴미디어가 담당하지 못하는 부분에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종래 출판문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작은 영역으로서 활자매체를 통한 문화전달자로서의 기능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문화권 형성이라는, 그 사회가 지향해 나가야 할 고급문화의 창출을 위한 기획, 판단하지 않으면 살아남지를 못하게 되는 사회조건의 성숙을 이런 데서 찾아야 하리라고 본다.

이러한 맥락을 짚어보면 고급문화 창출을 위한 출판문화인들의 자세는 바로 세워질 수 있을는지 모른다. 다양한 사회계층의 공감대에 수렴하는 공통윤리와, 쉽게만 살려고 드는 요즘 만연되고 있는 이기적인 소시민의식을 간파하고 이들에게 희망과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그려줄 수 있는 책, 그러한 책을 저술할 수 있는 열심히 살아가는 저자, 그러한 저자를 발굴, 지원하여 동반자가 되어 책을 제작하는 출판사, 더욱 바라기는 이러한 뜻이 모여 정성스럽게 출간된 책을 읽어 주는 우리의 독자, 이들의 결합이 고급한 문화출판을 창출시키는 지름길일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결코 출판문화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지만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면서도 사람, 사람,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만 찾아지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듯이. 벌써 20년 넘은 일이지만 대학 1학년 때던가 읽었던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서 이해했던 뜻을 여기에 옮겨 본다.

뒷짐 진 채 파리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이 아닌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여 오늘의 바탕으로 환골탈태한, 한 걸음 더 나아간 건전한 사회를 꿈꾸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아웃사이더이다.

오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진정한 의미의 아웃사이더로서 혁명을 논하거나 바른길, 바른 사람을 헤쳐나가길 열심히 얘기하던 사람들의 가는 길을 콜린 윌슨은 두 가지 유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시민 의식을 그렇게도 질타하던 소시민 대열의 선봉에 서서 소시민의 이익보호를 위해 내일의 정신적인 풍요 속에 살기를 선택하기보다는 오늘 등 따습고 배부르면 된다고 당연하듯 오늘을 열심히 사는 척하게 된다.

다른 유형으로는 처음에 가졌던 진정한 아웃사이더로서 오늘과 내일을 조화하며 내일을 위한 반석을 오늘에서 구하려는 대부분의 많은 소시민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미친놈이라 불리는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다.

어떤 학자는 이들을 창조적 소수라고도 부르며 이들이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지시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생을 누릴 뿐 남들의 질시에도 오불관언하며 또 남들에게 자기 뜻을 내세우지도 않으며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학(下學)이 상달(上達) 이며 하늘이 알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산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처럼 이렇게 자기 분야에 미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사회발전이라도 이룰 수 있으며 앞으로의 역사발전에도 역사의 신을 믿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출판문화라고 해서 여기의 범주에 빠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결코 내세우거나 다른 욕심을 부릴 수도 없는 역사의 행간에 흐를 수밖에 없는 출판문화의 큰 뜻을 이루려면 원고지 칸을 세고 활자와 함께 미쳐 춤출 사람이 더욱 절실하게 기대되는 분야인지도 모른다. 새해 새 아침이라고 한다. 항상 역사의 행간에라도 흐를 수 있도록 뜨거운 가슴과 초록빛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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